
여름에서 가을로, 낮에서 밤으로 흘러가는 해운대. 바로크풍 하늘에 뜬 반달.


고흐가 죽은 그 해 그려진 벛꽃나무. 과감하게 자른 구도 안에서 벛꽃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 타오를 듯 하다. 푸른 모노크롬 배경은 이 그림을 종교화처럼 보이게 한다. 봄바람에 한차례 그 풍성한 미(美)를 떨치고 남은 시든 꽃잎들에는 스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사카구치 안고의 <활짝 핀 벛꽃나무 아래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인간에게 주는 공포와 매혹을 벛꽃나무라는 매개를 통해 형상화한다. 지금이야 봄이면 벛꽃나무 아래서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주 먼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사카구치 안고는 '벛꽃 아래 풍경에서 인간을 빼 버리면 공포의 풍경이 된다'는 말로 서두를 연다. 활짝 핀 벛꽃나무 숲을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한 산적이 있었다. 잔인한 인간이었지만 벛꽃나무 숲만은 무서워 해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겁에 질렸다. 그러던 어느날 이 산적은 스즈카 고개를 지나가는 한 나그네를 죽이고 그 부인을 납치해 자신의 부인으로 삼게된다. 그녀는 교토 출신의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였다. 홀린듯 그녀에게 빠져든 산적은 그녀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여섯 부인을 죽이고 만다. 매일매일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산적은 '미'라는 것의 실체를 서서히 깨달아 간다. 이 소설의 뒷부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하다. 사람의 목에 집착하는 여자와 그녀를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의 목을 따와야 하는 산적의 행동은 미에 홀린 인간의 고독함을 잘 보여준다. 고독은 혼자일 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싶은 것에 대한 소외가 궁극적으로 불러오는 감정일 것 이다. 일본인들의 유미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는 데 마땅이 그런 평가를 들을 만한 소설이다.
여자는 빗이라든지 머리에 꽂는 장식품이라든지 비녀라든지 연지 따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가 진흙 묻은 손이나 산짐승의 피에 젖은 손으로 조금이나마 옷을 만지기라도 하면 여자는 그를 야단쳤습니다. 마치 옷이 그녀의 생명인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일인 것처럼, 몸 주변을 깨끗하게 하게 하고, 집손질을 명했습니다. 그 옷은 홑겹의 옷 위에 가느다란 끈으로 묶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몇 겹이나 겹쳐 입고 수많은 끈을 이상한 형태로 묶어 불필요하게 길게 늘여뜨려, 색색의 장식물을 달아 하나의 모습을 완성시켜 가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그리고 탄성을 올렸습니다. 그는 이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미가 완성되고, 그 미에 그 남자가 만족하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나의 개체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불완전하고 이해 불가능한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물건을 완성시키고, 그 물건을 분해하면 무의미한 조각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그 나름대로 하나의 신묘한 마술처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사카구치 안고, <활짝 핀 벛꽃나무 아래에서>
나는 그녀를 포옹했고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으며 두 눈에서는 눈물이 솟았습니다.
그녀의 얼굴, 어깨, 눈물로 젖은 손에 키스를 퍼부으며-오, 나와 그녀는 얼마나 불행했던가!-
나는 그녀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격렬한 고통과 함께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 것이며 거짓에 찬 것이었는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나는 사랑을 할 때에는 평상적 의미에서의 죄악이냐 덕이냐,
행복이냐, 불행이냐 하는 것보다 더욱 높고 중요한 것에서부터 사랑에 관하여 자기 논증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아무런 논의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바비의 공연을 다녀왔다. 기타 하나 덜렁 메고 자기 세계 속에 빠져들 수 있는 그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은 정신의 자유를 가장 극단까지 밀고간다.
새로운 음율을 만날 때마나 또 얼마나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지만 음악은 언제나
내 상상력의 범위 밖에서 집을 짓고 있는 것 같다.
페트릭 코필드의 이 그림처럼 음악과 술은 항상 매직 카펫을 동반하고 날아든다. 우리의 삶 속에.

<정바비와 관객들> 06. 12. 16.
'한겨울에 천둥' 소리와 폭설이 함께 했던 공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