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천둥처럼

by maud
해운대, 어느 저녁, 반달



                                   여름에서 가을로, 낮에서 밤으로 흘러가는 해운대. 바로크풍 하늘에 뜬 반달.
                                    
by maud | 2007/06/11 16:15 | jurnal intime | 트랙백 | 덧글(0)
활짝 핀 벛꽃나무 아래에서
                                                                                 Van Gogh, Cherry Blossom, 1890
 

고흐가 죽은 그 해 그려진 벛꽃나무. 과감하게 자른 구도 안에서 벛꽃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 타오를 듯 하다. 푸른 모노크롬 배경은 이 그림을 종교화처럼 보이게 한다. 봄바람에 한차례 그 풍성한 미(美)를 떨치고 남은 시든 꽃잎들에는 스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사카구치 안고의 <활짝 핀 벛꽃나무 아래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인간에게 주는 공포와 매혹을 벛꽃나무라는 매개를 통해 형상화한다. 지금이야 봄이면 벛꽃나무 아래서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주 먼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사카구치 안고는 '벛꽃 아래 풍경에서 인간을 빼 버리면 공포의 풍경이 된다'는 말로 서두를 연다.  활짝 핀 벛꽃나무 숲을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한 산적이 있었다. 잔인한 인간이었지만 벛꽃나무 숲만은 무서워 해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겁에 질렸다. 그러던 어느날 이 산적은 스즈카 고개를 지나가는 한 나그네를 죽이고 그 부인을 납치해 자신의 부인으로 삼게된다. 그녀는 교토 출신의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였다. 홀린듯 그녀에게 빠져든 산적은 그녀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여섯 부인을 죽이고 만다. 매일매일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산적은 '미'라는 것의 실체를 서서히 깨달아 간다. 이 소설의 뒷부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하다. 사람의 목에 집착하는 여자와 그녀를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의 목을 따와야 하는 산적의 행동은 미에 홀린 인간의 고독함을 잘 보여준다. 고독은 혼자일 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싶은 것에 대한 소외가 궁극적으로 불러오는 감정일 것 이다. 일본인들의 유미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는 데 마땅이 그런 평가를 들을 만한 소설이다.

여자는 빗이라든지 머리에 꽂는 장식품이라든지 비녀라든지 연지 따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가 진흙 묻은 손이나 산짐승의 피에 젖은 손으로 조금이나마 옷을 만지기라도 하면 여자는 그를 야단쳤습니다. 마치 옷이 그녀의 생명인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일인 것처럼, 몸 주변을 깨끗하게 하게 하고, 집손질을 명했습니다. 그 옷은 홑겹의 옷 위에 가느다란 끈으로 묶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몇 겹이나 겹쳐 입고 수많은 끈을 이상한 형태로 묶어 불필요하게 길게 늘여뜨려, 색색의 장식물을 달아 하나의 모습을 완성시켜 가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그리고 탄성을 올렸습니다. 그는 이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미가 완성되고, 그 미에 그 남자가 만족하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나의 개체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불완전하고 이해 불가능한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물건을 완성시키고, 그 물건을 분해하면 무의미한 조각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그 나름대로 하나의 신묘한 마술처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사카구치 안고, <활짝 핀 벛꽃나무 아래에서>     

by maud | 2007/01/10 16:49 | penetrating taste | 트랙백 | 덧글(0)
체홉을 읽다
내가 러시아 작가들의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이유는 북구의 백야만큼 긴 그 이름들과(또한 변주되는 이름들을 포함해),
평생 할 생각을 단 한시간에 하는 듯한 그들의 사고회로 때문이리라(참 궁색한 변명이다...)
그래서 '못'읽었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그때, 당당히 '안'읽었노라고 답한다.
그래도 프랑스 문학의 세련됨이나 일본 작가들의 달달함, 미국인들의 건조한 위트에 지칠때쯤
한번은 도전의 의미에서 펴보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정력적인 글이다.

그 이름마저도 도끼로 머리를 패는듯한 도스토옙스키는 그래도 꽤 단골처럼 내 책상을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다. 악령은 상권을 끝내고 하권을 버려두었으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벌써 2년째 유형지에 있다.
겨우 그 막장을 본 책은 '백치'와 '지하생활자의 수기', 그리고 '영원한 남편' 정도다.
러시아의 또다른 문호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정비석의 성황당과 함께 고등학교 시절 접한 가장 야한 명작 중에 하나로 기억된다.

우디 알렌의 범죄와 비행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문학교사인 우디가 아름다운 제자 줄리엣에게: 투르게네프가 에피타이저라면 톨스토이는 잘 차려진 저녁 식사이고 도스토옙스키는 성대한 만찬이라고. 그런데 난 러시아 정식을 한번에 차려놓고 이것저것 맛보는 한정식처럼 즐기고 있달까...
어쨌든 체홉은 아직 밥상에도 오르지 못했던 요리인데 얼마전 몇편의 단편을 읽었다. 그런데 그 맛이 새콤하면서도
씁쓸하다. 도스토옙스키가 몇 장에 걸쳐 쓴 감상을 한 줄로 요약한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비유라는 성운을 끼고 있는 행성같이. 다자이 오사무가 그의 소설과 희곡에 열광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의 소설엔 병적인 우울과 벛꽃처럼 스러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올 봄엔 그의 벛꽃동산을 읽어봐야겠다. 해사한 제목이지만 슬픈 늬앙스를 띠는.

 


나는 그녀를 포옹했고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으며 두 눈에서는 눈물이 솟았습니다.
그녀의 얼굴, 어깨, 눈물로 젖은 손에 키스를 퍼부으며-오, 나와 그녀는 얼마나 불행했던가!-
나는 그녀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격렬한 고통과 함께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 것이며 거짓에 찬 것이었는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나는 사랑을 할 때에는 평상적 의미에서의 죄악이냐 덕이냐,
행복이냐, 불행이냐 하는 것보다 더욱 높고 중요한 것에서부터 사랑에 관하여 자기 논증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아무런 논의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안톤 체홉, <사랑에 대하여>
by maud | 2007/01/03 11:20 | 미분류 | 트랙백 | 덧글(0)
기타와 노래하기


  정바비의 공연을 다녀왔다. 기타 하나 덜렁 메고 자기 세계 속에 빠져들 수 있는 그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은 정신의 자유를 가장 극단까지 밀고간다.

  새로운 음율을 만날 때마나 또 얼마나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지만 음악은 언제나

  내 상상력의 범위 밖에서 집을 짓고 있는 것 같다.

  페트릭 코필드의 이 그림처럼 음악과 술은 항상 매직 카펫을 동반하고 날아든다. 우리의 삶 속에.


                             <정바비와 관객들> 06. 12. 16.

                              '한겨울에 천둥' 소리와 폭설이 함께 했던 공연    

                           

by maud | 2006/12/19 16:56 | jurnal intime | 트랙백 | 덧글(0)
세 그루 나무
<

<the three tree>,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Etching, drypoint, and engraving on laid paper, 1643
 
<해변에 여인>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중래가 하릴없이 걷던 바닷가의 모래 언덕에서 나란히 선 세 그루의 나무를 보고 넙죽 업드려 절하고 오열한다. 순간 누구도 공감하기 힘든 한 인간의 실재적 삶이 드러난다. 중래는 나중에 문숙에게 자신이 나무에 절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불가사의한 이 경험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렘브란트의 에칭화 <세 그루의 나무>에서 개별적인 나무들이 보편성을 획득하여 신성함 속에 머물듯이 나무는 한순간 영적인 공간을 창조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은 늘 여름을 보내던 발베크 해안에서의 일상적인 산책 도중 문득 눈 앞에 솟아 오른 나무를 바라본다. 불쑥 눈앞에 나타난 그 나무가  너무나 실재적으로 다가와 마치 산책하는 자신이 책 속에 나오는 한 정경처럼 느껴지고만다. 
  다소 수다스러워진 홍상수의 이번 영화가 로메르적인 코메디를 연상하게 하지만 더 깊게는 푸르스트와 연결된 로메르와 닮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네러티브에 없어도 좋을 '죽은 시간'이지만 바로 이 시간이 그의 영화를 구원한다. 일상의 반복을 견디게 하는 것은 일상을 초월하는 순간과의 조우뿐이다. 비루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구원받을 가능성 속에 있다.      
 
 
by maud | 2006/10/10 16:26 | jurnal intime | 트랙백 | 덧글(0)
What cannot be said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밖에 놓여져 있어야 한다. 세계안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일어난 그대로 일어난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어나고 또 존재하는 경우란 모두 우연적이기 때문이다.....우연적이 아닌 것은 세계 안에 존재할 수 없다....그것은 세계 밖에 놓여져 있어야 한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보여져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by maud | 2006/09/26 17:45 | penetrating taste | 트랙백 | 덧글(0)
conte d'hiver
Eric Rohmer / Conte d‘hiver / 1992 / 114min / france / color
 
로메르의 사랑스러운 계절연작 중 <겨울>의 한 장면. 주인공 펠리시아가 성당에 앉아 있던 순간 문득, 앱스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빛쪽으로 고개를 돌린 카메라는 어떤 계시의 느낌을 펠리시아의 가슴에 심어 놓았다.  은총이 물질계에 드러나는 순간은 교묘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의 리듬 하나 만으로 완성되었다. 겨울의 앙상한 가지 위에 새롭게 돋아날 새순에 대한 기대가 영화 전편에 아름답게 녹아있다. 믿으라 그러면 당신이 기다림이 이루어질 것이다.
by maud | 2006/08/08 18:58 | penetrating taste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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